조각들

블랙핑크 제니

작업기 

 

참고한 사진의 이목구비가 워낙 뚜렷하고 큼직큼직해서인진 몰라도 생각보다 엄청 빠르게 그렸다. 그동안 그림을 그릴 땐 중앙선만 잡고 나머진 직관으로 비율을 따지면서 그려왔는데, 이번 그림이 가장 비율을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 비율을 잘 잡았기 때문인지, 여태껏 그렸던 그림 중에서 가장 원본과 닮게 그렸다. 그동안은 미세한 차이가 보여도 결과물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무시했었다. 그런데 작은 차이가 생각보다 결과물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눈의 구조가 매우 잘 드러나는 그림이라 이 그림을 통해서 눈의 구조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동안 "보이는 대로 그릴뿐인데, 왜 안 닮았지?" 이런 고민들이 있었다. 이런 고민은 특히 눈을 그릴 때 두드러졌는데, 이 그림을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눈을 차례로 완성해가면서 새삼 화장이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터칭들이 가져올 결과들에 대한 확신이 없다. 연필 소묘는 한 번 잘못 그리면 지우기 힘들기 때문에 더 조심하면서 그린다. 시간이 오래 걸렸던 이유들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어느정도 경험이 쌓이면서 그리는 속도가 서서히 빨라지고 있다는 걸 체감했다. 매번 지난 그림을 그릴 때 느꼈던 점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그려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는데, 이런 노력이 초반엔 힘들어도 실력이 빠르게 느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이번 그림에서는 처음으로 찰필과 떡지우개를 써봤다. 어떤 용도인지도 모르고 구입했는데 매우 유용했다. 세밀하고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표현이 힘들었는데 찰필이 해결해주었다. 다만, 종이가 상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 못하고 너무 박박 문질러서 눈 주변 종이가 조금 상했다. 다음부턴 주의해야겠다. 떡지우개 같은 경우는 처음에 너무 끈적거려서 "이걸 어떻게 쓰라는 거야." 이런 생각이었는데, 한 번 써보니까 앞으로는 이거 없으면 그림 못 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지우개질을 진짜 잘해야 한다. 특정 부분만 지워내면 되는데 주변 그라데이션까지 지워버리면 이질감이 생기기 때문에 복구하는데 애를 먹는다. 이전에 그렸던 그림들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떡지우개가 이 모든 걸 해결해주었다.

 

떡지우개 기능에 대해 알아보면서 플라스틱 지우개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플라스틱'이라는 단어 때문에 일반 고무지우개보다 품질이 떨어질 것 같다는 출처 모를 선입견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선입견을 없앴고,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다를 뿐 좋고 나쁨이 없구나." 이런 교훈도 얻었다.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은 눈동자에 동공과 조명에 의한 점이 하나씩만 있었는데, 이번 그림은 눈꺼풀이 조명에 비치기도 하고 조명이 사각형인 등 눈동자에 비치는 것들이 많아서 새로웠다. 완벽히 구현해내진 못했지만, 적당히 느낌을 내줬다.

 

이 그림에서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들 중 하나는, 어둠부터 깔아야 그것을 기준으로 밝음을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이 말을 이해 못했었다. 어둡고 진하게 그릴수록 잘 안 지워지고 자국이 남는데, 내가 진함을 어느 정도까지 표현하고 싶은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두운 것부터 표현해준다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에 그렸던 슬기 인물화에서 피부가 뿌옇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밝은 부분을 더 밝게 만들라는 피드백이 있었는데, 그것을 구현해내려면 어둠부터 깔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번 그림 역시 밝은 것부터 표현을 해주었는데, 어둠의 기준이 없다 보니 조금씩이라도 손을 대게 되고 손을 댄 부분에서 어둠을 추가로 깔아주니까 전체적으로 명암 대비가 잘 안되고 과하게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때문에 지인들에게 정글의 법칙 다녀온 제니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림 어떠냐고 계속 물어보면서 주변 사람들 귀찮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지만 덕분에 깨달았다. 다음 그림에서는 어둠부터 깔아서 밝은 걸 더 밝게, 어두운 걸 더 어둡게 만들어줘서 깔끔한 느낌을 내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그림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머리카락이다. 그동안 머리카락을 그릴 땐, 슬기 인물화처럼 찍어 누른 후 날려주는 방법을 썼는데, 별로 느낌 있는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엔 다르게 그려봤다. 확실히 느낌은 다르지만, 선이 깔끔하지 못하고 명암 표현을 잘 못해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입체감도 죽었다. 그림을 보면 왼쪽 머리 부분은 전체적으로 검어서 입체감이 죽은 반면, 오른쪽은 그나마 어둠이 부분부분 들어가 있어서 입체감이 조금이라도 느껴진다. 그동안 느낌이 안 살면 무작정 톤을 올려주는 버릇이 있었는데, 위 부분을 인지하게 됨으로써 이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머리카락에 대한 연구와 연습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 

 

한편, 지난 그림은 사진이 잘 안 나와서 불만이었는데 이번 그림은 전보다 잘 찍어냈다. 사진 찍는 것에 대한 연구도 계속할 것이다.

 


사용한 재료

 

스테들러 마스 루모그라프 100 HB, 3B, 6B

파버카스텔 떡지우개

크레타칼라 찰필 7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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